로마서 설교 -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더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더니
(로마서 4:16-24)
2022. 12. 28.(수)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도입) 세상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입니다. 내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의사는 확률을 이야기합니다. 몇 %의 확률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확률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볼까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이 소망할 수 없었던 것, 무엇입니까? 자기 몸에서 난 소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75세에 네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 하셨고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될 때까지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24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응답. 포기할만 하잖아요. 근데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19절부터 쭉 볼까요?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정말 차원이 다른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임신이라는 것은 다른 기도제목과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주님께 “주님!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각종 모의고사를 통해서 내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구나”라고 우리가 느낄 수 있고, 그것에 의지하여 계속 기도하며 공부할 수 있어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갖는 것은 다르잖아요. 임신은 한거면 한거고 안 되는거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루 하루 지나갈수록 절망이 쌓이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NIV성경은 이 단어로 아주 잘 표현해놨는데요,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그 말을 영어로는 이렇게 써놨습니다. “Against all hope.” 모든 소망에 반하여. 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처했던 상황을 짧지만 강력하게 써놨습니다. 모든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넌 안돼.”, “모~~든 소망이 너를 반대하고 있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속에서 아브라함은 in hope believed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반대하는 그 소망안에 거하여 믿었다는 거예요. 왜요? 그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조용기 목사님께서 인도네시아에 선교집회를 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새로운 삶, 은혜로 사는 삶이 시작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대요. 말씀을 전하신 후, 치유집회의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오늘, 휠체어 타고 오신 분이 나음을 입었습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휠체어를 타고 온 무리가 있는 20여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1분도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서 함께 수행하던 목사님이 너무 민망하여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셨다고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났습니다. 뼈와 가죽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이 사람이 걸을 수 있을까?” 싶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거예요. 그리고 곧 걷기 시작하더니 한걸음씩 강단을 향해 나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강단에 올라서자 큰 함성이 집회장소에 울려퍼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간증하기 시작했어요.
3년 전에, 조용기 목사님께서 자카르타에 오셨을 때, 너무 뵙고 싶었대요. 근데,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어서 그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다음에는 제가 있는 이 마을로 오시게 해주세요. 그렇게 3년을 기도했고 정말로 목사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집회장소에 왔을 때, 목사님께서 나았다고 선포했을 때, 주저없이 “아멘!”을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어요. 그리고 걸을려고 하는데 안되는 거예요. 일어서려고 하는데 꿈쩍도 안하더랍니다. 그런데 점점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듯 해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보려고 계속 시도했대요. 그러자 무언가 큰 힘이 받쳐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조용기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생각하고 믿고 꿈꾸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것을 4차원 영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고침 받은 분이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낫기를 소망하고, 믿고, 꿈꾸고, 아멘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평생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작은 목사님이 그곳에 집회를 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변화의 바람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을 타고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이라고 내 것으로 취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보라고. 이것을 “아멘!”으로 믿음으로 취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2022년, 마지막 수요예배입니다. 2022년에 어떤 소망을 품으셨나요? 한 해가 시작될 때 어떤 기도제목을 주님께 올려드렸나요? 우리가 오늘 타임캡슐을 열어볼텐데요.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소망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타임캡슐을 미리 열어보았는데요. 기도제목 4가지가 써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주님이 들어주셨고, 1가지는 아직 결과가 나오려면 조금 걸립니다. 2개는 아직 안 이루어주셨어요. 그 2가지 기도제목이 뭐냐면 첫 번째, 목요집회에서 함께 용인 땅을 위해 기도할 기도의 용사 100명을 붙여달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청년부가 배가부흥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둘 다 안 들어주셨어요. 목요집회는 11월에 최저 인원으로 예배했고, 청년부는 부흥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과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전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제목을 적도록 감동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아브라함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갖고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2023년에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응답은 25년이 걸렸습니다. 잉태하기까지 24년, 출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보았던 아브라함과 같은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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